나의 수필

가을을 두드린 진달래

향기나는 삶 2008. 6. 25. 11:42

마당 귀퉁이에 한그루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잎새들 다 털어내고  앙상한 가지만이 빈손으로

지나가는 바람을 매만지고 있던 6학년 어느 가을날,

 잠시 라디오 기술을 배우기위해 우리집에 얹혀 살았던

외삼촌과 뒷산으로 등산을 갔다.

 의연함과  당당함을 갖추고 사계절  같은 빛으로  푸른 군인처럼 산을 지키는  소나무를 제외하면

 생명력 잃은 풀잎들은 따사로운 햇살속에서 머리가 하얗게 샌 노파처럼 허리를 구부린 채

몸을 땅으로 낮추고  바람결따라 아래로 아래로 흔들거렸다.

오르는 동안 길 옆에 맹감이 빨갛게 익어 내 손길에 닿았다.

포송하면서도 떨떠름한 맛은  마른침이 고인 내 입안에 물고가 트인 논물처럼 침이 밀려왔다.

삼촌은 일부러 구멍난 묘지를 지나가면서  여우가 죽은 시체를 물어가려고

이런 구멍을 많이 팠다고 설명까지 덧붙이는데 온몸에서 소름이 빳빳하게 돋았다.

산길을 따라 걸으면 꿩들이 마른 칡넝굴 속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바스락거리더니 괴성을 지르며 산골짜기로 꼬랑지를 내빼며 도망을 쳤다.

산속의 고요는 바람속에서 흔들리는 마른 잎들의 재잘거림,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김으로 

아름다운 클래식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떨어진 마른 잎을 요란스럽게 밟으며 오르는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는

평화로운 음악소리에 잡음을 넣고 있는 서투른 음악 연주자일 뿐이었다.

산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맑고 청명한 가을 하늘이 소나무 맞닿아 구불구불 곡선을

그렸고  산 꼭대기는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양지가 바른 곳의  잎들은  벌써 세월을  먹고 색감들이 퇴색되어 가고 있지만

응지가 진 곳은 아직도 곱디 고운 색깔을 입은 잎새들이 고운 자태를 뽑내며

우리들의 입가에 탄성의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초라하지만 시골의 방에 꽂을 갈대와 빨강색,주황색 나뭇잎들과 들국화를 꺾으며 올라가고 있었다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옴팡하게 들어가 아늑하게 자리잡은 골안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멀리 구이저수지에 누가 반짝거리는  유리알을 뿌려놓고 지나갔던가!

물결의  움직임대로 빛들이 출렁거렸다.

시원한 바람이 흘러내리는 등줄기의 땀을  흡수하면서 지나가자 온 몸 가득히 한기가

엄습해왔다.

잠시 산등성이에 앉아  기울어가는 가을의 모습을 눈으로 훔치며 막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누가 나를 응시하며 보고 있는듯한 느낌을 감지했다.

맑고 고운 눈동자가 나를 보고 미소지으며 부르는 듯한 야릇한 기분이랄까!

난 그 힘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겼다.

잎이 떨어지고 엉성하게 몇개 붙어 있는 나무에 한송이 분홍빛 꽃망울이

바로 진달래꽃이었다.

봄에 피는 진달래꽃송이, 나는 잠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에  진달래는 봄에 피는 꽃에 속해 있다고 초등학교 1학년부터

배웠고, 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봄이 되면 또한 진달래꽃이

우리집 앞산에 불꽃을 이루며  분홍빛으로 불을 켜 놓았다.

그런데 늦가을에 핀 진달래 한 송이로 인해 학교의 교과서 내용은 허위가 되어 버렸다.

분명 내가 서 있는 곳은 억새가 만발하게 핀 가을의 한 귀퉁이였고 내 손에는 들국화꽃을

쥐고 있었으며, 내 발 밑에는 갈색으로 떨어진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있었다.

계절에 어울리게 피는 꽃만을 생각했던 어린 소녀는  분홍빛  진달래를 넋을 잃고

눈을 의심하며 보고 또 보았다.

형형색색 물들어진 고운 잎새들이 하도 고와서 봄이 온줄 알고 꽃망울을 터트렸을까!

떠난 임을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된 이야기처럼 저 꽃도 무슨 사연이 있어 꽃이 피지 않았을까!

산능선에 까치발 새우며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꽃이 되어버린 어느 여인의 슬픈 눈망울이 아니었을까!

차마 진달래를 꺾지 못하고 고요한 산중에 홀로 두고 오면서 가슴 한 구석이 아리고 아팠다.

저물어가는 가을을 두드리고 찾아온 진달래를 보면서 6학년 소녀의 가슴에 지금까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한 송이 꽃망울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리움처럼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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