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을에 본 진달래에 남다른 감흥을 흑백 원고지에 표현한 것으로
백일장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과, 6학년동안 일기쓴 노트 서너권을 모아서
교육청으로부터 상 받은 것이 고작이다.
시인이 되어보려고 꿈을 키워온 적도 없었다.
힘겹게 사는 것에 바빴고, 내 몸무게 60kg이 넘게 되면서 모든면에 의욕상실이 발생했으며
집안살림을 도우면서 학교생활을 묵묵히 하는 평범한 생활을 탈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갔다.
나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동일한 대학교 중국어 중국문학과 다녔고 친구오빠는 영문학과를 다녔다.
그녀의 오빠에게는 내가 다니는 대학교에 아름다운 연인이 있었다,
친구와 만나다 보면 친구의 오빠와 자동적으로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강의 시간이 비거나 강의가 끝나면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친구의 오빠는 군대에 있었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지루한 군대생활에 윤활유가 될 수있는 위문편지를 한 통씩 보내면
군대생활이 금방 갈 것 같다고 요청을 해서 편지를 쓰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군대 생활을 했던 그 분의 글에는 간적이 한 번도 없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비경들을 상상할 수 있는 문구들이 많아서 글을 읽을 때마다 머리속 가득하게 상상의 나래를 폈다.
글의 내용 또한 두서없이 엮어가는 내글에 비해서 훨씬 간결하면서도 정돈된 글이었다.
내가 오히려 그 분의 글을 보고 글의 매력을 느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물론 후에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였지만 오빠는 문학도 였다고 했다.
어쩌다 그녀가 오빠의 낙서된 시를 보면 시인이 쓴 글로 착각할 정도였다라고 회고 했다.
오빠가 휴가를 나오면 친구들하고 군대의 이야기를 맛갈스럽게 잘하시고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표현하셨다.
사랑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친구오빠의 사랑은 아름다운 표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와 사귄지 오래 되었고 그 여자는 술도 제법할 줄 알고 사고가 진보적이라고 하였다.
자유분방하지 못한 내 생활과 동떨어진 여자에 대해 동경까지 할 정도였다.
휴가 나오면 가장 먼저 연인을 만나고 우리들은 그 다음이었다.
어느날 휴가 나와서
"경자 너는 글을 쓰면 좋을 것 같다. 감정이 풍부해서 이성과 결합하면 좋은 글이 될것 같구나"
어쩌다 보내는 위문편지에 대한 응당 표현하는 겉치레적 인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빠의 말을 무심하게 흘려보냈다.
오빠는 어떤 영문인지 모르지만 대학교 졸업할 즈음에 그 여자와의 이별이 있었고
같은과 여학생과 사귀게 되었으며 결혼까지 했다.
나도 사랑을 하면 저렇게 멋지게 사랑을 할 것이라고 다짐을 하였던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순간이었다.
서신을 통해 글이 오고 가면서 내 마음 한 켠에 오빠를 좋아하던 감정이 있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연인이 있는 오빠를 좋아하는 내 마음 들킬까봐 멀리서 바라본 바보같은 사람이었다.
어차피 그 연인과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상황이었다면 과감하게
내마음을 열어보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에 대해 용기가 없었고
내마음 속에 꽉찬 열등의식이 나를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그 분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언젠가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길 간절히 바랬던 나는 오빠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름다운 사랑만을 꿈꾼 탓일까!
속앓이 했던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생각해보면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것으로 간주할
부분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혼 생활은 다소 현실적인 문제가 따르는 것을 보면서 오빠의 사랑이 지속되지 말았어야하는 부분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제주도에서 군생활했던 오빠에게 다소 위안이 되었던 작은 서신왕래가
내 자신 속에 내재된 끓는 피를 발견해 준 것에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앞으로도 글 쓰는 피나는 각고의 노력을 더욱 더 배가 시킬 것이며 더 좋은 글을 담아낼 것이다.
나의 소질을 발견해주신 그녀의 오빠에게 현대시선 책이 출간되면 한 권을 선사해 드리고 싶다.